[일러두기] 2026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순천에서 '아류(亞流) 포럼 2026'이 열렸다. "'비주류'라 불려 온 것들이 만드는 아시아의 새로운 흐름"이 주제였고, 형식은 '한일 생태문명전환 게더링'이었다. 글쓴이는 3일간 일본에서 참여한 이들과 동행했다. 그들이 실천해 온 장면들은 그야말로 '생태문명전환'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썩는 돈'이라는 공감 화폐, 리더가 없는 공동체 마을, 숲자본주의, 대안학교를 지원하는 회사, 관계경제를 상상한 영화. 현대사회와는 맞물릴 것 같지 않은 이런 개념들이 '아류 포럼'에서 울려 퍼졌다. 5회에 걸쳐서 포럼을 소개한다.
'돈이 없다'고 하는 건 '지갑이 비었다'라는 뜻일까? 돈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며,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일까? 돈이 충분하면 우리 삶은 그만큼 풍요로워질까? 우리는 날마다 돈을 벌고 쓰고 모으면서도 정작 '돈이 무엇인지' 좀처럼 묻지 않는다.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고, 너무 자주 사용해서 생각되지 않는다. 돈은 우리 삶을 둘러싼 절대 조건이 되어 버렸다.
사에키 류조(佐伯龍蔵)와 료쿠차 마유(緑茶麻悠)가 공동 연출한 영화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바로 이 무심함을 깨뜨린다. 영화는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가난한 영화감독의 궁핍한 일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 법정화폐 바깥에서 구르는 지역화폐,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물물교환과 생태농업이 일으키는 삶, 예술노동이 주는 가치와 창작을 위한 지속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정통 사회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대안경제를 설명하는 교육영화도 아니다. 현실을 비추는 장면들 사이로 황금벌레와 볍씨, 벌집, 광석 라디오, 이차원 방송과 수수께끼 같은 판타지가 끼어든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실과 상상, 경제학과 연금술이 뒤섞인다. 이 혼합을 통해 돈이라는 거대한 현실을 오히려 낯설고 기묘한 환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로맨틱한 금전감각'에서 '로맨틱'하다는 말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어 온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힘이다. 돈이라는 제도와 가치기준, 노동에 따른 보상과 교환규칙이 결코 자연법칙은 아닐뿐더러, 인간이 만들어 낸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른 약속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가 찾아 나서는 '로맨틱한 경제권'은 그런 '다른 약속'의 현실을 짓기 위한 감각 실험이다.
그림1) 사에키 류조(佐伯龍蔵)와 료쿠차 마유(緑茶麻悠)가 공동으로 감독·각본·편집·출연을 한 영화 '로맨틱한 금전감각' 포스터다.
판타지 다큐멘터리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2023년 일본에서 제작된 115분 길이의 독립영화다. 교토를 거.으로 활동하는 사에키 류조와 료쿠차 마유가 공동으로 감독·각본·편집·출연을 맡았다. 한 마디로 북치고 장구치고다. 두 사람은 독자적인 금전감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났고, 지역공동체를 취재했다. 그 기록에 허구와 판타지 장면을 덧입혀서 재구성했다. 일본 언론이 '유머와 부드러움이 넘치는 판타지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한 이유다.
영화는 "제17회 다나베·벤케이영화제"에서 필미네이션상을 받았고, "도쿄다큐멘터리영화제2023" 장편 경쟁부문에서 준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다나베·벤케이영화제"의 필미네이션상은 해외에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작품에 주어지는 상이다. 이후, 영화는 교토의 데마치자, 도야마의 호토리자, 도쿄의 테아트르 신주쿠, 오사카의 테아트르 우메다와 시네 누보, 고베의 모토마치영화관 등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아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제와 형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일 터이다. 영화는 돈의 본질을 따져 묻지만, 그 답은 경제 전문가나 통계자료에 있지 않다. 두 감독은 가난한 독립영화 제작자인 자기 자신을 영화 속 인물로 등장시켰다. 그들의 가난한 삶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출발。이었고, 지역화폐 공동체에 대한 취재는 다큐멘터리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떠오른 상상은 픽션과 판타지로 끼어 들었다.
자기반영 구조에서 두 감독은 관찰자이면서 관찰 대상이고, 질문자이면서 답을 모르는 당사자였다. 그들은 카메라 뒤에 숨어서 세계를 해설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당황하고 실패하면서 헤맸다. 바로 이 무지와 무능력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감독들은 돈에 대한 정답을 몰랐기에 삶이 가진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영화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창작을 계속할수록 가난해지는 예술가 현실을 날것으로 노출했다. 그들은 결코 숨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독립영화 그 자체다.
무엇이 팔리는 영화이고, 무엇이 팔리지 않는 영화인가?
팔리지 않는 영화는 가치가 없는가?
시장에서 가격을 얻지 못한 창작은 실패한 것인가?
영화는 돈을 얻지 못하는 영화와 영화인을 보여 준다. 돈에 대한 질문은 두 감독의 생존과 창작을 동시에 압박하는 몸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영화는 "가난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창작자"라는 낭만적 신화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들이 보여준 가난은 우스꽝스럽고 난감하며 때로는 초라했다. 바로 이 초라함 때문에 영화는 솔직했다. 영화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은 너무도 솔직한 장면들을 보면서 크게 웃었고, 조용히 울었다.
두 감독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돈 없이는 영화조차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인정에서부터 돈과 가치가 정말 같은 것인지 묻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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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제17회 다나베·벤케이영화제"에서 필미네이션상을 받았고, "도쿄다큐멘터리영화제2023" 장편 경쟁부문에서 준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사진은 제17회 다나베·벤케이영화제 수상자들이다.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에키 류조(佐伯龍蔵), 세 번째가 료쿠차 마유(緑茶麻悠)이다.
황금벌레와 광석 라디오 사이, 돈은 무엇인가
영화 속 류조와 마유는 아무리 일해도 늘 돈이 없는 가난한 영화감독 부부다. 돈을 벌지 못하는 까닭은 팔리지 않는 독립영화를 계속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설정을 자조적인 유머로 제시하지만, 그 안에는 예술노동의 구조적 모순이 놓여 있다. 창작을 위해 시간과 노동을 투입할수록 생계는 위태로워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면 정작 창작할 시간이 사라진다.
마침내 생활비마저 바닥난 어느 날, 두 사람은 영화 제작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날 밤, '낯선 여행자'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깊고 낮은 소리로 묻는다.
"돈이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한다.
돈은 물건을 사는 수단인가…….
노동의 대가인가…….
국가가 보증하는 숫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인가.…….
미래를 위해 저장한 시간인가…….
아니면, 노동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인가…….
두 사람은 침묵한다. 돈을 쓸 줄만 알았지, 돈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질문을 받은 뒤, 집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류조는 갑자기 황금벌레로 변하고, 놓아둔 기억이 없는 볍씨와 벌집이 나타난다. '광석 라디오'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온 듯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단골 백반집 텔레비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고가 흐른다.
이 기묘한 사물들은 돈이 출현하기 이전의 가치와 교환을 환기시킨다. 볍씨는 생명을 낳고 씨앗을 남기는 순환 경제 상징이다. 벌집은 중심 명령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협동과 공동생산 구조를 떠올린다. 황금벌레는 돈을 좇다가 돈 빛깔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변신처럼 보인다. 광석 라디오는 아무 가치도 없었던 돌이 적절한 관계기술을 만날 때 먼 곳을 수신할 수 있는 매체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씨앗은 땅물햇빛농부의 노동을 만나야 생명이 된다. 벌집은 벌들의 협력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돌은 광석성질안테나코일이어폰전파 등의 관계 속에서 라디오가 된다. 돈 역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제도약속관계를 통해 가치가 생긴다.
류조와 마유는 법정화폐 바깥의 경제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지역화폐를 스스로 발행하고 사용하는 공동체를 만난다. 돈을 자본 증식이 아닌, '관계를 잇는 매개'로 사용하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엔화 바깥에 다른 경제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화가 이 여정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성장서사와 다르다. 주인공들은 돈의 비밀을 완전히 풀지 못하며, 명확한 해결책을 얻지도 못한다. 대신 돈을 바라보는 감각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차 돈만이 영화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법정화폐 바깥에 '다른 화폐'가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일이다.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사회 교환의 강력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모든 가치의 유일한 척도일 수는 없다. 돌봄, 우정, 환대, 자원봉사, 공동체 노동, 생태적 가치, 창작의 기쁨처럼 돈으로 정확히 환산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경제질서 자체가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하나의 거대한 믿음일 수 있다. 모두가 종이와 숫자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화폐는 작동한다. 그렇다면 지역화폐와 물물교환, 호혜와 선물의 경제를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영화는 오히려 국가화폐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현재의 질서야말로 가장 거대한 환상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
그림3) 영화 속 '낯선 여행자'이다. 생활비마저 바닥난 어느 날, 두 사람은 영화 제작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날 밤, '낯선 여행자'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깊고 낮은 소리로 묻는다. "돈이란 무엇인가요?"
돈 감각을 되찾는 일
돈을 비판하는 많은 영화는 부와 빈곤의 격차, 금융자본의 탐욕, 노동착취와 인간소외를 폭로한다. 그런 고발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폭로 이후의 자리를 살핀다.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어떤 교환과 관계를 만들어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사에키 류조는 돈을 다룬 작품들이 주로 돈의 잔혹한 측면을 보여 주고, 또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구체적인 선택지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는 '다른 선택지를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료쿠차 마유 역시 관객이 돈에 관한 기존 이미지를 잠시 비워 내고, 아이디어에 따라 '다른 방식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감각을 얻기 바랐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제도를 단숨에 전복하는 혁명보다, '금전감각'을 바꾸는 작은 실천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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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금전감각은 돈을 아끼고 관리하는 능력이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고, 가격을 비교하며, 손해 보지 않는 소비를 하는 능력. 그러나 영화는 이 말을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여기서 금전감각은 무엇이 얼마인지를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지를 판단하는 감각이다.
왜 어떤 물건에는 큰돈을 지불하면서 다른 사람의 노동에는 인색한가?
한 편의 영화, 한 끼의 밥, 한 사람의 돌봄에 얼마의 가치를 부여하는가?
가격이 낮은 물건은 정말 가치가 낮은가?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얻은 것은 반드시 사회적으로도 소중한가?
돈을 많이 버는 노동은 가치 있는가?
돈을 벌지 못하는 돌봄과 창작은 무가치한가?
이 질문들은 경제적 판단을 윤리적 판단으로 되돌린다. 가격은 시장이 결정하지만 가치는 관계 속에서 생긴다. 가격은 숫자로 통일되지만,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영화는 가격과 가치가 일치한다는 믿음에 틈을 낸다.
그 틈에서 '로맨틱'이라는 말뜻도 분명해진다. 로맨틱함은 현실성 없는 감상이 아닐 터. 모든 것을 숫자로 바꾸는 세계에서 숫자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지키는 태도일 터. 효율보다 관계를, 축적보다 순환을, 경쟁보다 공감을, 익명으로 하는 거래보다 얼굴을 마주하는 교환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으로써 말이다.
법정화폐는 편리하다. 돈만 지불하면 상대가 누구인지,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희생되었는지 몰라도 된다. 돈은 낯선 사람들 사이의 거래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관계를 지운다. 구매자는 생산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생산자는 구매자의 삶을 알지 못한다. 교환은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익명적이다.
지역화폐는 이 익명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관계가 드러나게 한다. 사용 범위가 특정 지역이나 공동체로 한정되기 때문에 돈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잘 보인다. 사람들은 지역화폐를 주고받으며 지역 안의 가게와 생산자, 이웃과 활동을 다시 발견한다. 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돈 뒤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로맨틱한 경제권'은 사랑신뢰공감고마움환대 역시 실제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는 화폐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가족과 이웃의 무급 돌봄, 공동체의 자원활동,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계, 오랜 시간 축적된 공공재가 없으면 시장경제도 존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돈을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데 있다. 돈은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지, 삶의 목적이나 가치의 유일한 척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삶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으로 바뀔 때 인간은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의 부속물이 되어 버린다.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돈에 붙들린 감각을 풀어 놓는다. '돈이 있다'는 것과 '풍요롭게 산다'는 것이 다르고, '돈이 부족하다'는 것과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나 유쾌하게 보여 준다. 이 작은 차이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돈의 흐름을, 그리고 관계의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
그림4)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이다. 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자연 속의 여행자'인 유야마 다이이치로, '폐자재 에코빌리지 촌장'인 소바지마 히류, '고택에서 만난 사람'인 타케, '비영리 주식회사 유모(eumo)'의 아라이 카즈히로, 타케이 코조. 타케이 코조가 발표한 '썩는 돈'은 첫 번째 기고 글에 있다.
결핍을 상상으로 채우다
이 영화 제작 과정은 영화가 주장하는 내용과 닮았다. 부족한 자본과 경험은 결핍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는 조건이 되었으므로.
사실 사에키 류조가 돈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건네준 『엔데의 유언―근원에서 돈을 묻다』였다고 한다.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 1929~1995)의 문제의식을 읽은 뒤 돈에 대한 관념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돈을 주제로 한 영화를 구상했지만, 돈이라는 주제가 너무 크고 보편적이어서 이야기가 피상적이고 값싸게 느껴지는 문제가 있었다.
료쿠차 마유와 만났고, 코로나19도 겪었다. 그는 일본 문화청 지원사업 'ARTS for the future! 2' 공모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미뤄 둔 기획을 실행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2022년 3월부터 공동 연출로 제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부족했고, 현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장면과 이야기를 확보하지 못했다. 촬영한 분량만으로는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문제와 마주한 것이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라면 추가 취재를 하거나 내레이션과 자료화면으로 빈틈을 메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결핍을 숨기는 대신 그 빈틈에 판타지와 픽션을 집어넣었다. 거의 매일 창작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다큐멘터리와 픽션 장면을 반복해 촬영했고, 촬영 기간은 1년 가까이 되었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장면을 먼저 촬영한 다음, 그 결과를 바탕으로 픽션 부분의 각본을 쓰고 다시 촬영하는 제작방식을 택했다. 현실이 먼저 있었고 허구가 뒤따랐다. 뒤늦게 만들어진 허구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지 않았다. 오히려 취재 과정에서 포착하지 못한 감정과 질문, 연결고리를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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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쿠차에 따르면 픽션 부분의 약 70~80퍼센트는 각본을 따랐고, 나머지는 즉흥연기로 채웠다. 두 사람이 각각 쓴 각본에 서로의 생각을 덧붙였고, 상상 장면을 삽입해서 다큐멘터리에 비어 있는 지.을 연결했다. 여기서 픽션은 다큐멘터리가 가진 리얼리티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다른 현실의 층위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그림5) '로맨틱한 금전감각' 속 장면들이다. 일본 언론은 이 영화를 '유머와 부드러움이 넘치는 판타지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미학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섞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경계에서 '어떤 감각이 생겨나는가'에 있을 터이다. 다큐멘터리는 지역화폐가 실제로 작동하는 공동체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보여 준다. 픽션은 그 현실이 두 감독의 내면에 어떤 파문과 상상을 일으켰는지 시각화한다. 전자가 세계의 바깥을 기록했다면, 후자는 그 바깥과 마주한 사람의 내면을 기록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운다. 다큐멘터리는 환상을 현실에 묶어 두고, 판타지는 취재한 현실을 굳어 버리지 않게 한다. 이질적인 형식의 공존은 지역화폐가 법정화폐와 다른 가치의 층위를 열어 보이는 방식과도 닮았다. 하나의 화폐만 존재할 필요가 없듯이, 하나의 현실 재현 방식만 존재할 필요도 없다.
아주 흥미로운 장면은 '광석 라디오'다. 처음 편집본을 본 스태프들은 영화 속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두 감독은 돌을 다른 사물로 바꾸는 대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돌은 광석 라디오가 되었고, 다른 차원의 소리와 연결되는 매체가 된 것이다.
료쿠차는 돌의 모양을 바꾸지 않더라도 관。을 바꾸면 돌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돌이 가진 능력을 알지 못하면 평범한 돌에 불과하지만, 광석 라디오가 되어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순간 연금술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의 형태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내는지가 중요하다.
이 장면은 영화를 읽어내는 좋은 은유다. 부족한 촬영물은 실패한 재료일 수 있었지만, 관。을 바꾸니 '판타지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형식이 되었다. 가난 역시 창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결핍이지만, 두 사람은 그 결핍을 영화의 출발。으로 삼았다. 돌이 라디오가 되듯이 부족함이 형식이 되고, 실패가 서사가 되며, 돈 없음이 돈을 묻는 영화로 전환되었다.
료쿠차가 "이 영화는 절대로 AI가 만들 수 없다"고 말한 까닭도 이러한 제작과정에 있다. 그 말은 두 감독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발로 이동하며, 실제 사람을 만나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감각을 쌓아 올렸다는 자부심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의 울퉁불퉁함과 느슨함, 불균질한 장면과 우연한 만남은 효율적으로 생성된 결과가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 낸 시간의 흔적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AI가 만들 수 없다"는 선언을 인간 창작 대한 방어로 읽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좋은 예술이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아니다. 관건은 창작자가 세계와 실제로 관계를 맺는가에 있다. 영화 속 취재대상은 두 감독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놓은 만남의 주체였다. 이 관계의 시간은 영화의 내용일 뿐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물질적 토대였다.
그림6)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난한 영화감독의 궁핍한 일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 질문을 따라 법정화폐 바깥에서 구르는 지역화폐,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물물교환과 생태농업이 일으키는 삶, 예술노동이 주는 가치와 창작을 위한 지속 가능성을 탐색한다.
돈에서 관계 통화로
지역화폐는 국가가 발행하고 법으로 통용력을 보장하는 법정화폐와 구별된다. 특정 지역이나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며, 지역 내부의 교환과 관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법정화폐가 넓은 범위의 익명적 거래에 적합하다면, 지역화폐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신뢰와 연결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영화는 독자적인 금전감각을 실천하는 여러 사람과 공동체를 취재했다. 비영리 주식회사 'eumo'는 '공감 공동체 통화'를 발행하고 운용하는 대안 화폐 플랫폼이다. 또한 대안공동체 사이하테와 지역화폐 '유루' 사례도 중요하게 소개된다. 이 공동체들은 법정화폐를 완전히 폐기하는 대신, 법정화폐가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공감과 호혜, 공동체 기여와 지역 안의 순환에 별도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지역화폐는 화폐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만들 것인가를 실험하는 장치다. 국가화폐는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는 강.을 지니지만, 그만큼 지역을 빠져나가기 쉽다. 지역 가게에서 사용된 돈이 대기업 본사나 금융시장으로 이동하면 지역 내부에서 다시 순환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사용 범위가 제한된 지역화폐는 지역 안에서 계속 손을 바꾸며 생산자와 소비자, 주민과 상。, 활동과 활동을 연결한다.
더 중요한 차이는 가치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법정화폐 가치는 국가 신용과 법적 강제력에 기초한다. 지역화폐 역시 운영 주체와 규칙이 필요하지만, 그 생명력은 참여자 사이의 신뢰에서 나온다.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으면 지역화폐는 유통될 수 없다. 서로가 이 통화를 받아들이고 '다시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공유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이 .에서 지역화폐는 '모든 돈이 본래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을 가시화한다. 법정화폐도 결국 수많은 사람이 그 가치를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작동한다. 다만, 그 믿음의 규모가 너무 크고 제도화되어 있어 관계의 성격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리지날바다
. 지역화폐는 작고 제한된 만큼 화폐 뒤의 약속과 신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지역화폐와 함께 농사짓는 삶을 비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사는 생산물을 사고파는 행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씨앗을 심고 기다리며, 날씨와 토양, 계절과 생태의 순환에 몸을 맞춰야 한다. 씨앗은 다음 계절을 위해 남겨지고 이웃과 나누어지며 공동체의 생존을 이어 간다.
자본주의는 빠른 회전과 증식을 요구하지만, 농사는 기다림과 되돌아옴을 가르친다. 법정화폐는 공간 경계를 넘어 이동하지만, 지역화폐는 한 장소에 머물며 반복 순환한다. 이러한 느린 순환은 돈을 축적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흐름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다고 지역화폐를 무조건 이상화해서는 안 될 터이다. 지역공동체에도 권력관계와 배제, 불평등이 존재한다. 신뢰를 강조하는 통화가 내부인과 외부인을 나누거나, 공동체의 도덕을 개인에게 강요할 위험도 있다. 작은 경제권이 안정적인 생계와 복지, 대규모 공공서비스를 모두 감당할 수도 없다. 지역화폐만으로 주거비와 의료비, 교육비와 사회보험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지역화폐를 완성된 해답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다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사례일 뿐이다. 하나의 통화가 모든 가치를 독.해야 하는가. 국가화폐와 지역화폐, 시장교환과 호혜, 임금노동과 공동체 활동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공존할 수 없는가. 돈이 한 종류뿐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삶을 조직하는 방식도 다원화될 수 있다.
그림7) '로맨틱한 금전감각'의 비평적 힘은 메시지를 실제로 '스크린 밖의 상영방식으로 확장했다'는 데 있다. 두 감독은 '로맨택한 금전감각'을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일반 관람료를 미리 정하지 않고, 영화를 본 관객이 자신이 납득한 금액을 사후에 지불하는 '금전감각 상영'을 기획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감독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지역화폐의 가장 큰 힘은 경제 규모가 아니다. 그것은 화폐를 다시 정치적·윤리적 토론의 대상으로 만든다. 누가 돈을 발행하고,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며, 어떤 활동을 장려하고, 돈이 어디로 흐르게 할 것인가. 법정화폐 체제에서는 전문가와 중앙기관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지역화폐는 공동체 토론장으로 돌려놓는다.
돈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돈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어떤 노동은 성장하고 어떤 노동은 사라진다. 어떤 삶은 보호받고 어떤 삶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지역화폐는 이 사실을 작고 구체적인 규모에서 보여 준다. 화폐를 설계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사회적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영화값은 누가 정하는가
'로맨틱한 금전감각'의 비평적 힘은 메시지를 실제로 '스크린 밖의 상영방식으로 확장했다'는 데 있다. 두 감독은 '로맨택한 금전감각'을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일반 관람료를 미리 정하지 않고, 영화를 본 관객이 자신이 납득한 금액을 사후에 지불하는 '금전감각 상영'을 기획했다.
이 기획은 2023년 교토의 미니시어터 데마치자와 도야마의 호토리자에서 실제로 실행되었다. 이후 이들이 실행한 기획은 '상영운동'으로 이어졌다. 관객은 입장하기 전에 빈 캡슐을 받는다. 영화를 본 뒤 "이 영화에 얼마를 지불하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해 돈을 캡슐에 넣어 극장에 돌려준다. 어떤 상영에서는 엔화뿐 아니라, 관객이 가진 지역화폐나 스스로 만든 교환권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기획은 이른바 '원하는 만큼 지불하라'는 마케팅과 비슷해 보이지만, 핵심은 할인이나 관객 유치가 아니다. 관객이 영화 가격을 직접 결정하는 순간, 관객은 소비자에서 가치판단의 당사자로 바뀐다. 바로 이것이 마케팅과 결정적 차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관람료는 이미 정해져 있다. 관객은 작품을 보기 전에 돈을 지불하며, 영화가 만족스러웠는지는 가격에 반영되지 않는다. 인기 있는 상업영화와 실험적인 독립영화, 거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와 거의 무자본으로 만든 영화의 티켓 가격은 대체로 같다. 영화 관람료는 작품의 가치가 아니다. 상영 시설과 배급 체계가 설정한 시장가격이다.
'금전감각' 상영은 이 익숙한 질서를 뒤집었다. 먼저 영화를 보고 나중에 가격을 정하게 했으므로. 관객은 불편한 질문과 마주할 터!
이 영화에 얼마를 내야 할까?
재미를 기준으로 정할까?
제작에 들어간 노동시간을 생각할까?
경제 형편을 우선할 것인가,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의미를 더할 것인가?
여유가 있는 관객은 관람료보다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관객은 감당할 수 있는 액수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이 방식은 동일 상품에 동일 가격을 부과하는 시장 평등 대신,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형편과 판단에 따라 참여하는 다른 평등을 요청한다.
그렇다고 이 방식이 완전히 평등한 것은 아니다. 자발성에 의존하는 구조는 창작자와 극장에 경제적 위험을 떠넘길 수 있다. 예술노동 가치를 관객의 선의에 맡기는 게 정당한가라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창작자는 이미 오랫동안 무급 또는 저임금 노동을 감수해 왔는데, 관람료마저 불확정적으로 만든다면 그 불안정성이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금전감각' 상영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술과 돈의 관계를 관객 앞에 노출하는 퍼포먼스였다. 고정가격 체제에서는 가려져 있던 질문, 곧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얼마인가, 예술의 공공 가치는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 창작자의 생존을 시장과 관객의 선택에만 맡겨도 되는가, 라는 문제가 선명해진다
오락실게임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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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8) '로맨틱한 금전감각'의 두 감독. 료쿠차 마유(緑茶麻悠)와 사에키 류조(佐伯龍蔵). 이들이 기획한 '상영운동'은 영화관을 소비공간에서 토론과 교환의 장소로 바꾸었다.
이 상영운동은 영화관을 소비공간에서 토론과 교환의 장소로 바꾸었다. 관객이 캡슐에 넣는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영화에 대한 평가, 자신의 경제상황, 창작노동에 대한 태도와 돈을 대하는 감각이 함께 들어갔다. 빈 캡슐은 관객의 '금전감각'을 담는 작은 투표함이 된 것이다.
미니시어터이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이라는 .도 중요하다. 대형 멀티플렉스는 표준화된 가격과 시간표, 배급계약과 수익배분 구조에 따라 운영된다. 개별 영화에 맞추어 관람료 체계를 바꾸기 어렵다. 반면, 지역의 작은 영화관은 영화 내용과 상영방식을 연결하고, 감독과 관객이 대화하며, 상영을 하나의 공동체적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이 극장 개봉 이후 DVD 판매나 온라인 스트리밍 계획을 두지 않고 극장 관람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에키는, 작품을 집에서 즉시 소비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 영화는 '극장에 직접 와서 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영화의 희소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관객이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고 상영 이후의 '교류에 참여해야 영화의 질문이 완성된다'는 입장으로 읽힌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들
'로맨틱한 금전감각'이 우리 사회에 남기는 질문은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그 질문은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 있다.
왜 국가가 정한 화폐만으로 모든 가치를 측정하는가?
노동 가격과 노동 가치는 같은가?
돈을 벌지 못하는 예술과 돌봄은 무가치한가?
소비는 누구의 삶을 살리고 누구의 삶을 지우는가?
지역 안에서 생산된 가치가 지역 안에서 순환하게 할 수는 없는가?
공감과 신뢰, 환대와 감사도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는가?
창작물의 가격은 창작자와 관객이 함께 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풍요로운 것인가?
돈은 인간을 평가하는 언어가 된 지 오래다. 연봉과 자산, 집값과 매출, 조회수와 관객 수가 한 사람과 한 작품의 성공을 판단한다.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가난은 돈의 무능력과 실패의 표지가 된다.
그러나 영화 속 두 감독은 돈이 없다고 해서 창작 욕망과 관계 능력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 부족함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통화를 발견하며,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난은 미화되지 않지만, 절대적인 무가치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림9) 6월 21일, 토요일, 순천에서 상영회, 감독과의 대화가 끝나고 함게 모인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돈이 없다'는 사실과 '가치가 없다'는 판단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자본주의는 그 둘을 하나로 묶지만, 영화는 다시 떼어 놓는다. 가격표가 붙지 않은 곳에서도 삶의 가치는 생겨난다. 씨앗이 싹트고, 벌들이 집을 짓고, 돌이 먼 곳의 소리를 받아들이며, 사람들이 서로의 노동과 마음을 교환한다.
값은 사람들의 믿음과 약속, 국가 제도와 노동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고정된 본성이 없는 돈은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에 따라 억압이 되기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순환이 되기도 한다. 돈이 사람을 섬길 수도 있고 사람이 돈을 섬길 수도 있다.
문제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둘러싼 관계다. 돈을 축적과 지배의 방향으로만 흐르게 할 것인가, 돌봄과 창작, 지역과 생명의 방향으로 흐르게 할 것인가. '로맨틱한 금전감각'이 말하는 '로맨틱함'은 바로 이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영화는 경제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두 감독이 영화를 완성했다고 해서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질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에서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로, "돈이 얼마나 있는가"에서 "돈이 어디로 흐르는가"로, "무엇을 소유하는가"에서 "누구와 연결되는가"로.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흔들린 '금전감각'은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내가 건네는 돈이 어떤 삶을 지지하는지, 내가 지불하지 않은 가치가 누구의 희생 위에 놓여 있는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가 발견한 가장 로맨틱한 경제권은 특정한 지역화폐가 유통되는 공동체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을 쓰는 행위 속에서 관계와 책임을 다시 느끼는 모든 자리일 것이다. 한 편의 독립영화에 관람료를 지불하는 일, 지역의 작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일, 누군가의 돌봄과 노동에 정당한 값을 치르는 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도움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도 그 경제권을 넓힌다.
그림10) 영화 도입부의 한 장면이다.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이는 장면이다. '낯선 여행자'가 현실 속으로 파고드는 장면이기도 하고. 우리가 '돈'에 갇힐 때 어쩌면 낯선 여행자는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당신에게 돈은 무엇입니까?"라고.
'로맨틱한 금전감각'은 돈 안에 갇힌 감각을 돈 바깥의 관계로 열어 놓는 영화다. 그 문을 통과한 관객에게 '낯선 여행자'가 다시 묻는다.
"당신에게 돈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으로 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돈은 누구와 누구를 잇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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