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부터 도교까지… 고려사회 포용성 컸다
宋 사신 서긍, 오방색 인상 남겨
도성밖으로 무당 쫓아낸 이야기
마을 액막이 ‘선돌’ 세워 빌기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을 가나 주택가에 깃발을 내건 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깃발의 종류도 다양하다. 흰색과 붉은색을 내건 집도 있고, 붉은색과 푸른색을 매단 집도 있다. 거기에 태극기를 더한 집도 있다. 그 태극기를 위에 단 곳도, 아래로 내린 곳도 있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절 표시인 만(卍) 자를 써서 달아 놓은 집도 있다. 영락없이 이들 깃발 표시는 .을 치고 굿을 하는 무속인의 집을 가리킨다. 이들 깃발을 내건 집이 강화에는 유난히 많은 편이다. 강화도 바닷가 곳곳에서는 무속인들의 제사 지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무속인을 상징하는 깃발에 흰색, 붉은색, 푸른색을 왜 쓰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아마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오방색(五方色)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많다. 오방색의 푸른색[靑]은 동쪽, 붉은색[赤]은 남쪽, 흰색[白]은 서쪽, 검은색[黑]은 북쪽, 노란색[黃]은 중앙을 가리킨다.
중국 송나라의 서긍(1091~1153)은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기록한 ‘고려도경’에 이 오방색에 대한 인상도 남겼다. 서긍은 그중 남쪽을 가리키는 붉은색 기에만 신인(神人)을 그려 넣었다고 했다. 또 오방색 기 중 붉은색 기가 유난히 많다고 했다.
불교를 국교처럼 숭상한 고려시대에도 무속인이 넘쳐났으며 도교 신앙도 넓게 퍼져 있었다. 강도(江都) 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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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20년이 다 되어 가던 1251년 2월, 당시 실권자였던 최항이 ‘여자 무당[巫]과 남자 무당 박수[覡]를 성 밖으로 내쫓았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했다. 당시 궁궐이 있는 내성 안에도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는 얘기다. 쫓겨났다고 했으니, 그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고려시대, 무당들을 성 밖으로 쫓아내는 일은 가끔 있었던 듯하다. 1193년, 이규보가 스물여섯에 쓴 시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늙은 무당의 이야기인 ‘노무편(老巫篇)’에 보면, 이규보가 사는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었다. 날마다 많은 남녀가 거기 모여 음란한 노래와 괴상한 말을 해 불쾌했지만 딱히 몰아낼 방도 또한 없었다. 그러던 차에 국가는 무당들이 도성을 떠나 멀리 가서 살도록 명했다.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기에 이규보는 이를 치하하고자 시를 지어 남겼다.
‘고려사절요’와 이규보의 시 ‘노무편’에 나오는 도성에서 무당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속에 빠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겨났으며 당국에서는 그 원인으로 지목된 무당들을 도성에서 멀리 내쫓았다고 볼 수 있다.
왕이 나서서 산천 귀신에 비는 일도 많았으며, 그 산천 귀신에게 작위와 녹봉까지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강화 천도 3년이 되었을 때인 1235년 11월에는 일관(日官)이 나서 대궐 북쪽에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염만덕가위신주도량’을 베풀어 병화(兵禍)를 푸는 제사를 지낼 것을 왕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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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년 9월에는, 지금의 충남 온양 일대인 온수군을 몽골군이 포위해 형세가 어려웠으나 그 동네 관리 등이 출전해 크게 이긴 일이 있었다. 왕은 그게 이 고을 성황신(城隍神)이 도와준 덕분이라면서 그 성황신의 격을 높여주기도 했다.
고려에서는 불교 이외에, 무당들이 주도하는 성황신 믿음 같은 오래된 민속 신앙만 유행했던 게 아니다. 도교(道敎) 신앙도 사회 전반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도교와 관련한 이야기도 여럿 등장한다. 개성 북쪽 태화문 안에 복원관(福源觀)이 있는데, 그 전각 안에 삼청상(三淸象)을 그려 놓았으며, 고려 사람 누구나 도교에 귀의해 믿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서긍은 적었다. 서긍이 말한 복원관의 삼청상은 도교에서 신선 세계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일컫는다. 이 셋은 각각 옥황상제, 노자, 장자를 말하기도 한다.
이규보 역시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삼청(三淸)에 기도하는 초례문’을 쓰기도 했다. 여기 나오는 삼청 또한 도교의 그 삼청이다.
고려 사람들의 종교 대상은 실로 다양했다. 불교가 대세이기는 했으나 산천의 귀신을 의인화 해 섬기고 복을 빌었으며 도교에서 꿈꾸는 신선 세계를 앙망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사람들 스스로 마을의 액막이를 위한 선돌[立石]을 세워 빌기도 했다. 이규보는 그 선돌에 제사 지내는 축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의주(宜州) 입석(立石)의 제사 축문’이다. 당시 의주(宜州)는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 일대라고 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 이처럼 다양한 종교가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포용성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고려 문화의 화려함은 다양함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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